처음레터가 보내는 네번째 편지 2022. 07. 28(목), 혼자가 되는 시간 11:00에 만나는
네번째 독립일기 |
인터넷을 유랑하다 발견한 사이트. 명상 어플로 유명한 Calm이 제작했는데, 아주 단순하다. 이 창을 켠 채로 2분간 움직이지 않으면 된다. 키보드와 마우스가 멈춘 순간부터 시간은 줄어들기 시작하고, 조금이라도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인다면 시간은 초기화된다. 잠깐 가만히 있어 보았는데 1분 30초가 되었을 때부터 왜 이렇게 근질근질한지. 주말의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늘 한탄했었는데, 이번에는 2분의 시간이 얼마나 느린지 실감했더랬다. 120초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느끼는 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집에 혼자 있으면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을 줄 알았는데, 누워서 유튜브 숏츠라도 보고 있던 내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구나 싶었던 체험. |
지난 어느 날, 사람들이 배드민턴을 치고 산책을 하던 집 앞 공원에 멍하니 앉아있던 시간. |
올해 1월에 혼자 살기 이전, 룸메이트와 함께 살았던 적이 꽤 있다. 기숙사에도 살았고, 별도로 대학교 앞 자취방을 구하기도 했다 보니 자연스러웠다. 물론 그때는 매주 본가와 자취방/기숙사를 오갔기에 자취방은 3-4일 머무는 '임시 거처'의 성격이 강했다지만, 함께 공간을 나누고 생활을 공유하는 경험은 새로웠다. 나름 여럿 룸메이트를 거쳤는데, 가장 긴 시간 룸메이트였던 A가 내겐 대표적인 '룸메이트'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A는 기숙사의 첫 룸메이트였고, 몇 학기 지나서는 함께 자취를 했었다. A는 아침잠이 많은 나와 달리 이른 시간에 일어났고, 매일매일의 스케줄이 기분에 따라 결정되는 나와 달리 시간대별로 운동, 영어 공부, 철학책 읽기 등이 짜여 있었다. 나와 달리 피부 관리를 비롯한 자기 관리를 잘했고, 날마다 물건이 다른 곳에 있는 나와 달리 물건을 놓았던 제 자리에 놓는 습관이 있었다. 우리는 대화의 결이 맞아 매일 새벽 늦게까지 각자의 자리에 누워 잡담하고는 했다.
A와 함께 살며 A가 전해준 세계는 여전히 내게 남아 있다. 웬만한 요리를 웍을 통해 쓰는 것이 대표적이다. 자취방에서 A는 짐을 풀며 웍을 자랑스레 꺼내 들었고, "이거 하나면 자취 요리는 끝이다"라고 했다. 한 학기 동안 우리는 그 웍으로 닭가슴살을 삶아 먹었고, 김치볶음밥을 만들었고, 감자를 튀기기도 했고, 카레를 끓이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A가 없는, 홀로 지내는 내 방에서 요리할 때면 웍을 가장 많이 쓴다.
A는 흰 쌀밥을 먹지 않고 되도록 현미밥을 먹었다. 현미를 직접 공수해 온 A를 따라 나도 함께 현미밥을 지었다. 현미밥은 백미보다 더 오래 불려야 한다고 했고, 그에 따라 우리는 함께 식사 계획을 세우고는 저녁에 밥을 먹을 거라면 낮부터 밥 지을 준비를 했다. 지금 내 집에 밥솥은 따로 두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즉석밥을 먹는데, 그 즉석밥은 대부분 현미밥으로 구비하고 있다. 흰쌀밥은 볶음밥을 할 때 외에는 굳이 쓰지 않는다.
A는 때로 냉동만두를 꺼내 잘게 부순뒤 밥과 함께 볶은 뒤 굴소스를 넣어 음식을 만들었다. 굴소스는 A가 구비해 두는 유일한 소스였다. '이것만 있으면 뭐든 맛있다'던 그를 따라 나도 독립과 함께 굴소스를 먼저 샀고, 어느 날에는 홀로 만두 볶음밥을 해먹었다. A와 나는 영양보충을 하고 싶은 날이면 함께 순대를 사먹었다. 순대와 내장에 평소에 접하지 못하는 철분 같은 영양소도 많고, 단백질이 많다는 이유였다. 포장해 온 순대를 자취방에서 함께 먹었던 기억 탓에, 여전히 나는 뭔가 영양 보충이 필요하다 싶으면 내장을 더한 순대를 포장해 집에 들고 가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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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처럼 밀려드는 중식 웍, 현미밥, 굴소스와 순대라는 세계. |
A가 가진 여러 생활이 모두 내게로 전해져 온 것도 아니고, A와 룸메이트로 지낸 시간도 따지면 채 1년도 되지 않는다. 허나 내 인생 첫 룸메이트였던 A를 통해 나는 함께 사는 것에 대해 배웠다.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일상을 보내고, 다른 생활 습관을 지닌 사람과 함께 살며 나는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새로운 습관을 지니기도 했다. 그건 때로 불편했지만, 때로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는 일이 즐거웠다. 함께 사는 일은 한 명의 세계와 다른 한 명의 세계가 합쳐지는 일이고, 그 이후 각자는 본인의 세계에 새로운 '침범의 흔적'을 새기게 된다.
오롯이 나 홀로 공간에서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한 줄로 표현하자면, 즐거운 일이다. 내 취향에 맞추어 공간이 정리되어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구비되어 있고, 내 생활 습관에 맞춰 모든 규칙이 만들어져 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할 일도 없다. 마음이 복잡한 날 갑자기 말을 거는 사람도 없고, 화장실을 나눠 쓰느라 준비 시간이 오래 걸릴 일도 없고,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음식에 도전할 일도 없다. 과제를 하다 말고 게임을 하는 내 뒤에서 이어폰을 꽂은 채 영어단어를 외우며 내게 죄책감을 안겨줄 사람도 없다. 내가 늦게 일어나도 되는 날 일찍 일어나야 해서 알람을 울리는 사람도 없다.
말 그대로 평온하고, 규칙적이고, 예상할 수 있고, 안전하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모조리 제거된 공간에 나는 홀로 내 마음대로 있을 수 있으니까. 이 자유를 나는 오랜 시간 염원해 왔고, 내가 내 일상을 원하는 만큼 움직일 수 있음이 여전히 기쁘다. 하지만 '가끔은 불편하기도 한' 세계와의 동거가 문득 생각날 때가 있다. 이 완벽한 나만의 세계가 좋지만, 때로는 누군가가 나만의 세계에 들어와서 "오늘은 어학연수 갔을 때 배운, 뉴질랜드 국민 음식을 먹자"라고 하며 토스트에 베이크드 빈즈를 올린 자기 세계를 내미는 일도 썩 나쁘진 않았다는 걸 배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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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내 독립 공간 방명록에 가장 먼저 글을 남긴, 전 룸메 A. 연도를 22년도가 아니라 21년도로 써넣은 바람에 다음 방명록을 쓰는 사람들이 '이분 22년을 쓰려고 한 거 맞지?'라고 한 마디씩 남기게 됐다. |
📸 Meet 4. 버려진 종이컵으로 만드는 사진 |
취미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보통 '사진 찍기'라고 답을 해왔다. 취미라고 하기엔 사실 보잘 것 없어서 부끄럽지만, 사진 찍는 일을 좋아하니까. 그럼에도 인화는 잘 하지 않았는데, 찍는 양이 많기도 하고 디지털로 보는 게 익숙해서였다. 다만 독립을 하며 조금씩 사진을 실물로 만들기 시작했다. 직접 찍은 사진들로 집을 꾸미고 싶은 욕심이었다.
그러던 중 발견한 '줍다'라는 서비스. 폐 종이컵으로 인화지를 만들어 사진을 인화해주는 곳이다. 종이컵이 인화지가 된다는 게 언뜻 쉬워 보이기도 하고 신기해 보이기도 하는 오묘한 느낌이라, 인화라는 행위에 무언가 의미를 더하는 듯해서 어느새 사진들을 골라 주문을 넣게 됐다. 그렇게 받아본 사진들은, 폐 종이컵이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잘 모를 듯한 느낌이었다. 일반 인화지보다는 덜 반들반들하지만, 크게 모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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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포장지에는 'Photo for Earth'라는 문구가, 오렌지색의 사진 편지 봉투에는 'Orange is New Green'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문구들이 사진의 의미를 되새겨주어서 좋았다. |
한 종이에는 줍다의 미션이, 한 종이에는 내 이름과 함께 내가 줄인 이산화탄소가 적혀있다.
종이컵은 재활용이 어렵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
💬 Answer 2. 만약, 독립 요정이 만 원을 쥐어주고 간다면? |
지난주, 이런 질문을 보냈었지. 독립한 내게, '독립 요정'이라는 존재가 나타나서 "잘 쓰렴!"하고 만 원을 쥐여주고 간다면? 그럼 나는 그 만 원을 어디다 써야 할까-하는 이야기. 나라면 칠레산 적포도를 구매해버리겠다는 다짐을 함께 보냈었다. 그에 대해서 자신만의 '만원의 행복'을 알려준 분들이 있어서, 아래에 소개. 다음엔 또 다른 질문을 가져올 예정! |
"저는 버거킹... 신메뉴를 먹어 볼래요... 텍사스 칠리 와퍼... 왜냐면... 맛없으면 돈 아까울까봐 평소엔 못 먹으니깐... 그리고 비싼 버거 먹기 돈 아까워서 평소엔 5900세트만 먹으니깐..."
- 이홉들이
"올리브 오일을 살래요. 마침 다 떨어져서, 꼭 사야 했거든요! 파스타 앤 올리브 이즈 마이 러브!"
- 오늘
"전 상황 별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요!!!
1) 퇴근 후 혼자 집에서 저녁을 먹어야 하는 나를 위해, 꽈배기/마카롱/수박쥬스 같은 걸 알차게 사고 싶어요!
2) 생활에 쓴다면, 여름철 습기 관리해야 하는 시즌인지라 제습용 제품을 만 원어치 사고 싶어요! 제습제+탈취제를 사서 옷장과 신발장, 창고에 넣고 싶네요!
3) 독립 생활을 다채롭게 해줄 수 있는 인센스 스틱이나 디퓨저도 너무 유용할 것 같아요!!!"
-코지
"저라면... 행운의 1달러처럼... 걸어놓다가 비상시에 쓸래요! 자린고비 이야기를 떠올리며 요정님이 주신 1만원... 하고 걸어놓고 컵라면 먹기...ㅠ"
-션
"받자마자 편의점에 들어가서, 소주 한 병과 평소에 눈여겨 뒀던 편의점 안주들을 삽니다. 꽁돈은 원래 술로 탕진해야 하는 법...!"
-에이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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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fe 4. 이번 주의 생각 : 외로움을 걷어내는 봄날의 햇살 |
지난 6월 29일, 카스 맥주를 싣고 가던 화물차에서 2천여 병의 맥주가 쏟아지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비가 오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시민이 나서서 정리에 묵묵히 힘을 보탰다는 이야기. 카스 측은 이 영상을 올리며 "춘천시에 계신 진짜 영웅을 찾습니다"라고 제목을 달았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나온 대사인 '봄날의 햇살'이란 표현이 화제였는데, 영웅이 된다는 건 누군가에게 봄날의 햇살 같은 사람이 된다는 건 아닐지.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내 주변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 물론 그 일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현생을 살아오며 깨달아 왔지만 말이다(--)
비를 맞아가며 차가 오가는 사거리에서 남의 맥주를 함께 정리해주는 사람들을 보며, 과거 유럽을 여행하던 20살 내게 웃으며 다가와 도움을 준 아저씨 생각이 난다. 내 서툰 영어를 열심히 집중하며 목적지까지 함께 해준 그 아저씨 덕택에 내게 벨기에는 좋은 이미지가 됐었다. 나 역시도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할머니에게,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필요했던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도움이 필요한 순간은 외롭다. 오로지 나 혼자 이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야 하니까. 길거리에 쏟아진 맥주와 병들을 보며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을 사람에게 찾아왔을 그 외로운 감정을 달래준 시민들처럼, 나도 누군가의 외로움을 걷어내고 '우리는 함께 살고 있다'고 메시지를 줄 수 있는 봄날의 햇살이 되었으면.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봄날의 햇살들이 모이면 더 밝은 하루가 되겠지. |
오늘의 독립일기는 여기까지
처음레터는 독립과 함께 만나게 되는
수많은 처음의 상황과 감정들을 다뤄.
격주 목요일(당분간은 매주!), 혼자가 되는 시간 밤 11시에 메일함을 찾아갈게✨
이번의 편지나 처음레터를 두고,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이든 아래 링크로 편지를 남겨줘.
꼼꼼히 읽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볼게 🤔 |
더 많은 우리들의 독립과 처음에 대한 이야기가 알고 싶다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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